알코올의존 회복자님의 단주 수기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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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작관리자 작성일21-09-02 11:00 조회2,353회 댓글0건본문
중독의 덫 벗어나기
저주받은 무거운 짐 '신체장애'
어렸을 때부터 "넌 다르네." 라는 말에 신경을 곤두세우곤 했습니다.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저를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보는 시선이 늘 괴롭게 했었고 창피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른손 기형과 오른쪽 귀의 청각장애를 갖고 태어난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늘 놀림의 대상이였습니다.
매일 기도했습니다.
"친구들이 저를 놀리지 말게 해 주세요" 그리고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가 세상에 없게 해 주세요"라고 ····.
어린 시절부터 술을 먹고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저를 때리는 아버지가 무서웠습니다. 청소년기가 되면서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이 미움이 되고 미움이 원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보복이라 생각하며 저는 힘을 과시하기 위해 친구들에게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저를 놀렸던 친구들이 제 앞에서는 저를 더 이상 놀리지 못하고 폭력 앞에 맥없이 무너지는 모습이 통쾌했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어른처럼 행동하며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때는 이성에 눈을 떠 동거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동거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소식을 들었으나 도저히 아이를 낳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을 설득했지만 결국 집사람은 딸을 낳았습니다. 다행히도 딸은 기형을 가지지 않고 태어났습니다. 장애를 가진 아이가 태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빌었던 첫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셨던 것입니다.
희망을 잃어가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 경제활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경기도 군포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내내 가정생활은 뒷전이고 오직 술만이 저에게 용기와 즐거움으로 다가왔습니다. 술은 저에게 오직 하나밖에 없는 동반자이자 신 같은 존재였습니다.
집에서는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이라는 사고방식을 강요하며 부인에게 복종하도록 강요했고,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술을 마시고 가족들에게 폭력을 일삼으며 지냈습니다. 그러자 결혼 8년 만에 집사람이 이별을 고하고 저와 아이들을 떠나버렸습니다. 집사람이 떠난 것에 대한 분노와 원망으로 더욱 더 술을 많이 마셨습니다. 집사람이 떠나고 가정을 지키려고 노력해보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가족과 아내의 빈자리를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오직 술뿐이었습니다. 매일 술을 마셨고 원망이 더해지니 아이들을 죽여 버리고 자살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수없이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아이들에게 "너의 엄마는 몸 파는 여자다"라는 등 온갖 상상속의 생각을 아이들에게 주입시켰습니다. 제 내면에 아이들이 커서 내 대신 떠나버린 집사람에게 복수를 해달라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거짓말이 거짓말을 더해 사기꾼 수준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희망을 잃고 술에 빠져 약 4개월간 장취에 헤매다 보니 자식이 자식 같지 않고 커다란 바위로 느껴졌고, 아들을 때리며 화풀이를 하는 모습을 보다 못한 딸이 경찰에 저를 신고해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신병원에 입원
병원생활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난폭함이 극에 다른 저는 사람대접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저의 난폭성이 드러날 때면 보호조치 처분이 내려지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면서 병원에서 겉과 속이 다르게 편하게 생활하는 방법을 깨우쳤습니다. 교육을 받으면서 딴 생각에 빠져있고 병동에서 술을 마시지도 못한 대신 도박에 빠져 시간 가는줄 모르고 보냈습니다. 10개월가량 허송세월을 보내던 중 병원에 A.A. 메시지를 다니는 분의 경험담을 듣고 생각의 변화가 조금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겉과 속이 다른 '보여주기 위한 위선'이라 생각했습니다. 13개월 병원생활을 마치고 퇴원한 후 아이들을 두고 혼자 광주로 내려와 직장과 A.A. 모임을 다니면서도 자만심이 가득했습니다. 경기도에서 했던 직장생활 16년이 늘 자랑스러운 계급장이었고 이러한 저를 알아보지 못한 사장을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습니다. 장애를 갖고 있고 술 문제까지 있는 저를 어디에서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광주에서 구직활동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자 다시 경기도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마지막으로 A.A. 모임에 나갔습니다.
중독의 덫 벗어나기
그날 모임에서 어느 맴버선생님께서 "때를 기다려라"라는 말씀이 유독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다시 한 번 재기할 때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함평 장애인직업전문학교에 입소를 결정하고 1년 동안 기숙사생활을 하며 열심히 기술을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다른 것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술을 끊어야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일주일에 두번 1시간30분이 걸리는 이동시간에도 불구하고 A.A. 모임에 꼭 참석했습니다. 술만 마시지 않으면 새로운 세상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공부와 모임에 철저히 매달렸습니다. 그 결과, 전국장애인 기능대회에 입상하였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교육과정이 끝나고 취업을 해야 하는 시점이 다가왔으나 제 생각대로 취업이 되지 않았습니다. 기숙사 퇴소를 이틀 앞둔 날 광주동구중독관리센터 직업재활연계로 요양병원 관리실에 취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뛸 듯이 기뻤습니다. 기다리면 때가 온다는 맴버의 말씀이 맞는 말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취업을 해서 생활하는 동안 직장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반찬도 식당직원들이 챙겨주는 음식을 먹으며 한 푼이라도 아껴 아이들 교육비로 송금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A.A. 모임에 매일 참석을 했습니다.
제 생활에 가장 우선이 A.A. 모임이였습니다. 매일 퇴근 후 센터에 들려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12단계 발표를 통해 나를 점검하고 생활에 실천에 옮기는 노력을 통해 지금까지 단주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회복을 원하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같은 어려움을 가진 사람들끼리 함께하는 센터를 통해 서로 마음을 나누고, A.A.모임에 참석하여 생각을 서서히 바꾸어 간다면 세상에 한걸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았던 것처럼 도망치는 인생이 아니라 어떤 어려움도 부딪히며 배워서 이겨내는 것이 진정한 회복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첫술에 배부른 일은 없다는 것을 늘 생각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볼 것을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께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저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된 평온함을 청하는 기도로 두서없는 글을 마무리 지을까 합니다.
"어쩔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함을 주시고 어쩔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주시고 그리고 이를 구별하는 지혜도 주소서"
♣ 단주하는 당신을 응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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